2009년 4월 28일 화요일

친구의 친구

 내 친구의 친구 L은 한 외국계 금융회사에 다닌다. 그는 가끔 본사가 있는 뉴욕으로 출장을 간다고 한다. 얼마전에도  L은 회사의 중요한 일로 뉴욕 출장을 떠났었다. 일을 마치고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가 좀 남자 그는 시간을 때우려고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

 

 그는 술집에서 잭 다니엘에 콜라를 섞은 잭콜을 시켰다. 그리고 첫 잔을 막 비웠을 때, 갑자기 어떤 미녀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두 번째 잔을 사주고 싶다며 말을 걸어왔다. L은 그 여자의 과감성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훤칠하고 잘생긴 자신의 외모가 한국 밖에서도 당당히 통한다는 생각에 조금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좋습니다."

 

 L은 쿨하게 대답했다. 미녀는 뒷편에 있는 바로 향하더니 양 손에 술잔 하나 씩을 들고 돌아왔다. 한 잔은 L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한 잔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L은 여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기분좋게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그 미녀와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다음날 어리둥절한 상태로 눈을 떴을 때, L은 호텔 욕조 안에 누워 있었고 욕조에는 차가운 얼음이 둥둥 떠있었다. L는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의아해하며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움직이지 말 것! 911에 전화하시오.'

 

 누군가 미리 준비한 듯 욕조 옆 작은 탁자 위에는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L은 전화기를 집어들고 즉시 911을 눌렀다. 얼음 때문인지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안내원이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지금 L이 처한 상황에 꽤 익숙한 것 같았다. 안내원이 말했다.

 

 "선생님, 등 뒤로 손을 뻗어보세요. 천천히 조심스럽게요. 혹시 허리에서 튜브가 튀어나와 있는 게 만져지지 않나요?"

 

 L은 불안감에 떨며 조심스럽게 등 뒤를 더듬거렸다. 순간 것잡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튜브가 만져졌던 것이다.

 

 안내원이 말했다.

 

 "놀라지 말고 제 말 잘 들으세요. 선생님은 어젯밤 신장을 도둑 맞으신 겁니다. 요즘 이 도시에서 장기 절도 조직이 활동중인데,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이 그 피해를 입으신 것 같습니다. 지금 즉시 응급요원을 보내드릴 테니 그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마세요."

 

 

 

* 굉장히 충격적인 얘기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얘기는 실화가 아니고 지난 15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유행한 도시 전설이라고 한다. (친구의 친구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희한한 일을 많이 겪기도 한다.^^) 물론 그 내용을 살짝 비틀은 것임.

 

* <스틱>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스티커 메시지의' 많은 요소를 갖추었다고 한다.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도시락 그리고 114 안내원

"도시락이 안 되서 전화드렸습니다."

 

 나는 전화를 걸자 마자 그렇게 말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내원은 분명 어떤 매뉴얼이나 절차에 따라 내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목소리도 일부러 최대한 시크한 티를 내려 애썼다. 그런데 안내원은 내게 의외의 답변을 늘어놓았다.

 

 "고객님, 어디에 전화거신 겁니까? 여긴 114입니다."

 

 "거기, K*F 아닌가요?"

 

 "아닙니다. 고객님."

 

  순간 멋쩍어진 나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안내원이 나를 완전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14에 전화해 놓고는 대뜸 도시락이 안 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내가 저녁때쯤 전화를 걸었으니까 114를 도시락집으로 착각하고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필 왜 서비스 명을 도시락이라고 했을까. 뮤직파이, 뮤직스테이션, 뮤직앤해피 이런 식으로 했으면 오해샀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 해도 될 텐데 말이다.

 

- 오늘 하루 도시락이 불편했던 1人

 

   하지만 고양이를 보면 웃음이...^^

 

 

2009년 4월 15일 수요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상하게도 요며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내 뇌리를 자주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냥' 그것은 내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회사가 끝나고 동네 도서관에 갔을 때, 오늘은 아예 처음부터 일본문학 진열대로 향했다. 거기서 나는 어렵지 않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1, 2권이 나란히 진열대에 꽂혀 있었다. 마치 내가 빌려갈 것을 미리 알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땐 1권도 채 다 못읽었고, 읽었던 내용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표지와 앞뒤 몇 장을 훑어보니 과연 지금 나에게 가장 일용할 양식이 될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그책 두 권만 빌리고 도서관을 나왔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산책을 다녀와서, 씻은 후에 나는 비로소 책을 펼쳐들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조금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소설의 첫 장이 시작하기 전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은 왜 지금도 끊임없이 빛나고 있는 것일까

 새들은 왜 마냥 노래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세계가 벌써 끝났다는 것을

 

 시처럼 보이는 그 글은 Skeeter Davis가 부른 <The end of the world>의 가사였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오늘 내가 산책을 나갔을 때 흥얼거렸던 노래였기 때문이다.

 

*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Cause you don't love me anymore?

Why do the birds go on singing?
Why do the stars glow abov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it ended when I lost your love
...

 

 - <The end of the world>

 

 

 

2009년 4월 8일 수요일

가난한 사랑

 중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아이를 끌어안은 어머니들 혹은 아버지들의 모습이었다. 그네들이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서는 짙은 모성애와 부성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숭고함이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배우도 그 장면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은 밤길을 걷다가 더럽고 너덜너덜해진 옷을 입고 구걸하는 모자를 본 적이 있다. 모자의 모습이 내 망막에 비친 순간 그 가여운 이미지가 그대로 판화처럼 박혔다. 내색은 안 했지만 속에서 뭔가 쨍그랑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가난이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적당한 건강함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는 아닐까.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이들의 모습은 대부분 남루하고 허름했다. 아니,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 그랬다. 나는 비싼 옷을 입혀 주고, 해외유학을 보내주는 것보다 다정스럽게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더 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부정과 모정. 아무래도 난 그런 것들에 약한 것 같다.